왜 나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가
*일종의 일기로 평서문으로 작성하였습니다.
0. 글을 쓰는 이유
어떻게 하여 자유 의지에 관련한 논쟁을 하게 되었었다. 자유와 자유 의지와 관련해서 호모 데우스에 나온 주장이 있었는데, 정확한 주장을 알지 못하여 제대로 된 논쟁이 되지는 못했지만, 상대방이 받아드린 의미는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반박을 하고 싶음을 느끼고, 반박을 하고 적어도 지금 알고 있는 지식가지고는 왜 자유의지가 없다라는 주장은 할 수 없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우선 자유 의지라는 것을 일반 매체가 어떻게 정의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1. 상대방의 논리, 그리고 반박
사실 논쟁의 시작은 유발 하라리의 책에서 나타난 실험이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과학적으로 뒷받침 한다는 주장에서 나왔던 것이다. 너무 단순하게 보면, 유발 하라리의 말들이 설득력이 있다. 근데 그의 필력에 말려들지 않고, 천천히 뜯어보다 보면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유 의지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못 내렸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발 하라리의 일단 전체적인 논지를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데 한번 자세히 설명을 해보려 노력을 하겠다. 유발 하라리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A. 생화학자의 모델
ㄱ.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은 뇌에 있는 신경전달 물질에 의해 하는 것이다.
ㄴ. 신경전달 물질은 우리 세포에서 기인한 것이며, 세포가 그렇게 행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 유전으로 부터 오기 때문이다.
ㄷ. 그래서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생화학자(Biochemist) 모델을 인용한 논법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 기술을 하면서 '무작위적 사건 혹은 결정론적 사건'들로 인한이라는 표현인데,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는 표현이라고 본다.
왜 문제가 있는가? 일단 무작위적과 결정론적의 단어 관계를 잘 뜯어보자. 무작위가 아닌 것은 작위적인 것에 있다. 작위적인 사건에서는 이미 결정이 나서 바꿀 수 없는 사건, 결말이 정해져 있는 사건 (결정론적 사건 들),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그때의 결정에 따라 결말이 달라질 수 있는 사건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작가는 마치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건은 없고 오로지 무작위적인 사건만 있다고 결론을 짓는 것 같다.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의 뇌는 전기화학적 신호와, 세포와 유전자의 작용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복잡도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슈퍼컴퓨터는 초당 10의 18승에 해당하는 연산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뇌를 제대로 시뮬레이션을 못한다. 이것은 마치, 복잡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컴퓨터의 논리 회로의 현상이 단세포적인 현상과 다를바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귀결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입장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스케일이 다른 만큼, 규모의 현상이 있다고 보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하다고 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의 문제는 무작위적 또는 결정론적인 사건을 말하는데 있어서 마치 두 가지가 상호배타적이거나, 선택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처럼 말 한다는 뜻이다. 기저와 기초적인 수준에서 무작위적인 현상이더라도 조건을 통해 제어가 가능한 규모의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체와 같은 유체, 액체와 같은 압력을 토대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엔진과 유압 프레스와 같이 거시적으로는 제어가 가능한 현상들인 것이다. 즉, 그 근원이 무작위적인 현상이다 하더라도 규모가 쌓이고 구조가 생기면 추가적인 성질이 생기는 것 역시 가능하다. 즉 모든 부분을 단세포적인 현상으로 귀결시킨 이 논리는 중요한 부분을 배제한 것이다. 바로 규모의 현상이다.
B. 진화론과 자유의지
진화론은 왜 이야기 했는지를 모르겠다. 의지는 개체적 현상이고 진화는 집단적 현상이다. 의지는 현재에 대한 현상이고, 진화는 이미 결정이 난 현상이다. 진화에는 자유 의지가 없다. 다만 이 작가는 진화에 의지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의지가 없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중인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문제 의식은 우선 이 작가의 논리가 오류 투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싫어하는 이유긴 하다. 특히, 자유 의지가 없다라고 가스라이팅한다고 느끼는데, 우선 이 작가가 자유 의지가 없다라고 말하는데 있어서 자유 의지라는 것이 완전하게 자유해야하는 것처럼 가스라이팅 하고, 완전하게 자유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자유 의지는 완전한 자유함이라고 미리 정해놓고, 없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애초부터 제대로 정의를 해보려는 시도도 안해보고 그냥 없다라고만 우기려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자유 의지를 부정하기 전에 더 엄밀한 정의를 시도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작가 양반?
C. 뇌 스캐너
뇌를 통해서 행동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자유 의지가 없다는 근거가 될까? 그저 뇌가 생각과 행동의 근원이라는 것을 좀 더 세밀하게 확인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가? 실험적인 환경에서 스위치를 누르고 싶다 아니다 정도의 예측? 사람을 마치 세포처럼 대하는것이 아닌가?
D. 로봇 쥐
로봇 쥐 실험은 뇌에다가 전극을 꼽은 쥐를 가지고 싫어하는 일까지 하게 만든 실험이라는 것이다. 이건 좀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쥐같이 단순한 동물들에 대해서는 독립성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는데, 전극을 꼽고 태어나는 쥐는 어디있는가? 하물며 사람이 전극을 꼽고 태어나는가? 이는 자유 의지가 없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자유 의지를 빼앗아 갈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라는데 의의를 둬야하는 것이다.
2. 의도적으로 무시한 사실들, 그리고 의지라는 것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단세포 처럼 모델을 세운 까닭에 이 사람은 사람에게는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기작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까먹었나 보다. 사실 이런 주장을 펼치는것 자체가 좀 혐오스럽기 때문에 이 작가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데 앵무새나 침팬지와 같은 동물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에게 학습이라는 수단이 있다. 학습은 무엇인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드리고, 가설을 세우고, 생물학적인 기작을 토대로 생물학적인 것과는 무관한 현상들에 대해서 습득을 할 수 있다.
직접 실험해볼 수는 없겠지만, 사람은 결국엔 지식이라는 것을 습득하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택하는 행동이 무작위적이더라도, 특정 행동에 대한 기존의 확률 가중치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보량이 충분히 많으면 확률적인 현상이라기 보다는 알고리즘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현상은 과거에 대한 평가를 또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를 기록하거나, 기억을 토대로 평가를 하고 그때의 행동 확률에 대해 다시 한번 재고를 해볼 수 있다. 즉, 특정 단일 사건에 대한 확률에 대해서 평가를 해보고, 미래에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의지라는 것을 정의하자면 특정 사건에 대한 본인의 평가를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나 역시 자유 의지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를 당장 내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독립적인 사고개체로서 행동할 수 있는가, 지식을 습득하고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상황을 평가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들이 결국엔 운명을 바꾸고, 의지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여담
내가 과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렇지만, 유발 하라리는 과학에 대한 이해도를 조금 더 키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너무 역사를 많이 한 나머지, 과학의 특정 의미를 과대 해석하거나, 다른 조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너무 많다. 한마디로 너무 단순화 해서 현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과격한 주장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은 큰 틀에서 해석을 하는 과거가 있었지만, 현재는 거시적인 현상과 미시적인 현상에 대해서 조화롭게 해석해 나가려고 노력중인 상황이다. 그 어떤 것도 다 안다고 할 수 없고, 그 의미를 과대 해석하려는 경향의 과학자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지라고 느끼는 것은 뇌 속에서 존재하는게 맞다 할지라도, 뇌에서 느끼고 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자유 의지는 없다와 같은 가스라이팅식 결론을 짓기보다는, 앞으로 어떤 사실을 더 알아야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의지라고 느끼는 현상을 엄밀하게 정의하고 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